날마다 실연 - 나태주
햇빛 고우면 가슴 울렁였고
바람 맑으면 발길 서성였다
누군가 한 사람 먼 곳에서
기다려 줄 것만 같아서
그런 날이면 떠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붓꽃은 꽃대를 올려주곤 했다
겁도 없이 하늘에다 주먹질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바다물빛 샅을 열고서
나, 날마다 새롭게
실연을 당하고 싶었던 때.
(2006.2.12)
어려서부터 늙어 있었다. 어린아이면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혼자서 놀기를 좋아하고 한 곳에 주질러 앉아 멀거니 저쪽을 건너다보기를 좋아했다. 아무 것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언제든 세상은 나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저만큼 있었고 또 제멋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만 빼놓고 저희들끼리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둑한 나에 비하여 세상은 끝없이 반짝였던 것이다.
꼬마철학자. 무슨 일이든 행동으로보다는 생각만으로 참여하기를 좋아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외로웠다. 쓸쓸했다. 그렇지만 그 외로움과 쓸쓸함이 끝까지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조금 더 자라서 나는 더 늙어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세상과 불화했다.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손대는 일마다 삐걱거렸다. 20대 젊은이 시절. 나는 완전히 노인이 되어 있었다. 사변에 이르지도 못하는 몽 상의 숲 속을 어슬렁거리는 한 마리 떠돌이 짐승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꿈꾸는 나무?라고 여기면서 혼자서만의 성채 안에서 쪼끔은 행복하기도 했다.
자폐였을까? 가학이었을까? 야튼 그렇다. 특히, 여자 문제에 관해서는 더욱 서툴렀고 엉성했고 진흙 뻘 같았다. 만나는 여자마다 빗나갔다. 퇴짜를 맞았다. 여자들이란 감성으로 사는 동물이다. 그녀들은 일찌감치 내게서 소년이나 청년을 읽기보다는 노년을 읽어버렸으리라.
사실 나는 스무 살과 서른 살 어림쯤에 세상을 버리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위기감을 갖고 있던 위인이었다. 그 이상의 나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한 내가 서른 살을 넘긴 것은 기적이다. 서른 살 안쪽에 한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더욱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런 대로 내가 한 남자로서 자신감을 찾고 평형감각을 갖춘 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 삼십대 초반 무렵이었다. 지금보다 더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주위에 말벗도 많지 않았다. 일찍이 초등학교 선생이었다. 열 아홉부터였으니까 십 년도 넘게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 알아주거나 말거나 서울서 인정해주는 한 사람 시인이었다.
자전거 한 대가 있었다. 포장도 안 된 신작로 길을 먼지를 폴폴 날리며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는 것이 좋았다. 유일한 낙이었다. 값싼 운동화에 하얀 티셔츠 차림이었고 여전히 혼자였으리라. 그래도 자전거 위에 올라앉기만 하면 날아 갈 듯한 기분이었다.
늦은 봄. 바람도 향기를 머금고 속옷 자락을 팔랑대는 날. 온갖 꽃들이 차례를 정해 비슷한 꽃들끼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늦은 봄이라도 일요일 한낮. 목적지도 없이 멀리 멀리 가보고 싶었다. 그런 날이면 처마 밑이고 담장 밑이고 버려진 땅 한 구석지 터를 잡고 붓꽃은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 있기 마련이었다. 심해선 밖 물빛을 입에 물고 까무러칠 듯 진한 불루 한 가지로 피어 있는 붓꽃들. 그것은 차라리 나에게 아리따운 아낙이었고 멀리 그리운 사람이었다. 붓꽃은 날더러 네가 그리움의 애달픔을 아느냐, 먼 곳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진정 아느냐, 종주먹을 대면서 묻는 듯 싶었다. 내게도 정말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 때 나는 이미 그러한 나를 근심스런 눈빛으로 바라 보아주던 아내가 있는 사람이었다. 마음씨 무던히 곱고 착했던 사람. 지금도 그렇지만 내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토를 달지 않고 잘 들어주었던 여자. 그런 아내를 두고서도 나는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기만 하면 다시 한번 새롭게 실연을 당해보고 싶은 남자였다. 아, 내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 있기는 있었던가!
(2006.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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