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매우 사나워졌습니다. 정말로 이러다가는 지구가 영 잘못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지경입니다.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내려 바닷물이 불어났다느니, 수온이 올라갔다느니 그런 이야기들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날씨가 아열대로 변하고 있다는 소문들과 함께 말입니다.
장마철인데도 시원스럽게 비도 내리지 않고 그러더니 이번에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운 찜통더위요, 밤마다가 열대야의 연출입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도 몸이 무지근하여 영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여름에 덥지 않고 언제 덥겠는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한 일이요, 정작 그것이 여름다운 까닭이지요.
저는 결코 여름이 덥다 해서 어디로 피서를 가거나 그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더위를 피한다 해서 더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더위를 피하며 살아갈 시간의 여유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저는 입학시험 치르듯이, 휴가 나온 병사가 아까워하며 짬짬이 시간을 써먹듯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도 실은 지난번 제가 크게 앓고 나서 생겨진 하나의 변화입니다. 사는 일이 매우 바빠졌습니다. 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늘어났고요. 주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참 바쁘게 산다고요. 교직에서 정년하고 상근이 아닌 문화원장 자리에 있으면서 무엇을 그렇게까지 바쁘게 살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갑니다. 간혹 문화원장실로 볼일이 있는 분들이 찾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든 나한테서 시간을 많이 빼앗아 가는 사람이 부담스럽습니다. 그것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히떠운 세상이야기로 시간을 빼앗는 사람이 힘듭니다.
몇 년 전에 상영된 「버킷 리스트」란 영화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고 내용에 담긴 의미도 대강은 짐작을 합니다. ‘버킷 리스트’란 것은 결국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지난봄에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아내를 부추겨 함께 미국 엘에이를 보름동안 다녀온 것도 나에게는 실은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였으며, 우리 문화원의 젊은 직원들과 어울려 계룡산을 넘은 것도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정년퇴임 후에 내는 여러 권의 책들도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하나를 실천하는 일이겠구요.
병을 얻기 전에는 저도 술을 한두 잔은 마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얻어 췌장이 나빠진 뒤로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술을 한잔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조금은 부자연스러웠는데 지내고 보니 술을 아예 마시지 않는 것이 얼마나 깔끔하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시간이 많이 여유로워졌습니다. 또 그 시간들이 모두 말짱하게 정신 차린 깨끗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말한다면 ‘클린 라이프’가 된 것이지요. 왜 진즉 내가 이러지 못했던가, 후회스러울 지경입니다. 정치(精緻)한 인생, 정미(精微)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야호! 입니까? 내 인생을 내 주관으로 산다는 것. 나의 시간을 오로지 내가 지배하며 나를 위해서 써먹는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 이것은 그냥 하기 좋은 말로 남이 알까 무서울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누군가 제 남은 인생의 계획을 물으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할 수만 있다면 아침에 잠 깨어 이 세상 첫날처럼. 저녁에 잠이 들 때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하루하루는 이 세상에서 허락 받은 오직 한날로서의 하루하루입니다. 그리고 첫날이자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지구라는 아름다운 별로 여행 나온 여행자들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여름 날씨가 덥고 사나워도 올해도 가을은 올 것입니다.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는 사실! 이것도 엄청난 축복이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과 축복 속에 당신과 내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더운 날씨를 덥다, 덥다 말하는 당신의 목숨에 축하를 드리며 까치발로 기다리고 있을 당신의 가을에 대해서도 미리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2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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