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1

시인의 길로 이끌어준 한편의 시


- 나 태 주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1. 다다미 하숙방의 추억

한 편의 시, 오직 한편의 시를 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를 써온 기간이 길고 시를 읽어온 세월이 오래인 사람에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편의 시는 중요하다. 가령 눈을 감고 떠오르는 시인의 이름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 시인의 시들도 떠올려보자. 놀랍게도 여러편의 시가 동시에 떠오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한편의 시도 마뜩하게 떠오르지 않는 시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이 때 이름과 함께 얼핏 떠올라 주는 한편의 시야말로 그 시인의 얼굴이요 대표가요 때로는 전체집합이 될 수도 있는 일이겠다. 만약 이름은 떠오르는데 한편의 시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시인의 불행이요 한계점이 될 것이다.

나에게 눈을 감고서도 떠오르는 시인의 이름은 누구일 것이며 떠오르는 한편의 시는 어떤 것이겠는가? 여기서 나는 우선적으로 내가 좋아했고 작품으로 사사했던 시인들을 떠올려 보아야 한다. 문학소년 시절부터 전통지형적인 시들을 좋아했으므로 아무래도 그쪽의 시인들 이름이 먼저 떠올라 줄 것이다. 김소월, 김영랑, 신석정, 서정주, 청록파 삼가시인, 그 뒤로는 이형기, 박재삼, 박용래, 구자운, 박성룡 등등(작고 시인을 중심으로).
이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박목월 시인이다. 그렇다면 또 내가 좋아했던 박목월 시인의 시 한편은 어떤 것일까? 「나그네」,「九江山」,「이별가」,「효자동」,「뻐꾹새」등 여러 편의 작품이 떠오른다. 허지만 나는 그 많은 작품들을 제치고 내 생애 최초로 만난 그분의 시 한편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1959년. 중학교 3학년 시절. 나는 서천중학교 3학년에 다니는 키작은 학생이었고 입시철을 맞아 서천읍내의 한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숙이라 해도 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하는 그런 하숙이 아니었다. 한달에 쌀 몇 말씩 돈 대신 자져다 주기로 하고 밥을 붙여먹는 그러한 형식이었다. 그 시절은 모두가 그러했다. 내가 하숙을 들었던 집은 일본 사람들이 살다가 남겨놓고간 적산가옥이었다. 하숙집 주인은 교육청에 다니던 분이었는데 그 분도 정말로의 집주인은 아니고 다른 사람네 집을 세들어 살면서 웃방 하나를 비워 하숙생을 들이고 있었다.

방이 무척 추웠다. 다다미방이라 바닥 난방이 전혀 안되는 방이었고 방의 천정까지 휑뎅그레 높아서 저녁밥을 먹고 공부를 하려면 이불을 뒤집어 써야만 추위를 견딜 정도였다. 하숙생은 나 혼자가 아니고 동급생 하나가 더 있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허근. 허씨 성에다가 외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한두살 연상의 아이로 몸집도 나보다는 튼실했고 행동이나 말씨도 어른스럽고 진중한 아이였다. 우리는 공부하는 짬짬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도 자신의 처지, 가정형편 이야기, 부모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장래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교환이 있었지 싶다.

그런 가운데 책 이야기가 나오고 시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주제로 대화할 때 주로 친구가 말하는 사람이 되고 나는 듣는 편에 들어야만 했다. 이런 쪽으로는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허근이네는 우리 집보다 가정형편이 행결 좋은 편이었고 문화수준도 많이 높았던 것 같았다. 형이나 어른들 가운데 학교 공부한 사람도 여럿 있다고 했고 그의 집에 책이 많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집하고 여러 가지로 비교가 되었다. 당시, 우리집에서는 중학생인 내가 가장 많이 학교 다닌 사람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중학교 교과서가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책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추운 하숙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턱을 떨면서 공부를 할 때 허근이가 들려준 시가 바로 박목월 시인의 시 「산이 날 에워싸고」이다. 자기네 집에 있는 시집에서 베꼈노라며 그 친구가 자랑스런 목소리로 그 시를 읽어줄 때 나는 적잖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세상에 나와 최초로 접한 정말로 시다운 한편의 글이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글도 있나 싶었다. 그냥 서럽게 가슴에 안겨오는 언어의 꽃다발이 있었고 아뜩한 마음의 향기가 있었다. 차라리 그건 떨림 그 자체, 울음 그 자체였다. 노래보다 더 고운 선율과 출렁임이 있었고 그림보다 더 선명하고 화려한 빛깔과 이미지가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시의 분위기나 내용이 그 당시 춥고 가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나의 처지와 너무나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당장 나는 그 시를 노트에 베껴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입속에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 가난한 중학생들은 그렇게 한가한 시 읽기 놀음에 오래 열중할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고등학교 입학시험이었던 것이다.

그 뒤, 허근이란 친구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고 나는 부모님의 소원에 따라 사범학교에 진학을 했다. 공주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시의 실체를 비로소 만났다. 소년기의 어슴프레한 자아의식과 방황심리가 나로 하여금 시에 매달리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시에 열중했다. 오늘 와서 돌이켜보면 왜 그리도 시에 매달렸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지만 하여튼 시에 미쳐 살았다. 억지로 들어간 사범학교.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치부해버린 사범학교 공부. 초등학교 교사를 기르는 학교 공부가 싫었고 학교 생활 전반이 싫어 한사코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다가 그만 막다른 골목에서 시와 맞딱드린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공주 시내에 있는 고서점에서 찾아낸 아름다운 시집 몇 권이 나로 하여금 시인의 길로 이끌었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게 더 멀리로는 중학교 3학년 시절, 일본식 다다미방에서 지내던 하숙생 시절,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급생 친구로부터 들었던 박목월 시인의 시 한편「산이 날 에워싸고」가 나로 하여금 시인의 길로 손까불러 부르지 않았겠나 싶다. 가까스로 공주사대의 대학생 형들에게 부탁하여 대학 도서관에 있다는 『청록집』이란 책을 빌려다 읽을 수 있었다. 거기 「산이 날 에워싸고」가 실려 있었다.

아, 허근이란 친구네 집에 있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다가오면서 『청록집』에 실린 시편들은 한편 한편 나에게 감동과 경이를 동시에 주기에 충분했다. 박목월 시인의 시 뿐만 아니라 함께 실린 조지훈, 박두진 시인의 시들도 좋았다. 즉각 노트에 시들을 베꼈음은 물론이고 그 뒤로부터 나는 청록파 삼가시인들을 뒤쫒는 성실한 사도使徒가 되어갔다. 한 편의 시와의 만남. 그것은 운명과 같은 것이다. 한 사람과의 만남이 그 이후의 생애을 바꾸어 놓듯이 한편의 시와의 만남도 그렇다.

소년시절, 잠시 그렇게 하숙방에서 만나고 헤어진 허근이란 친구는 그 뒤로는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그와 내가 사는 집이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서이고 그가 진학한 서울과 내가 학교 다닌 공주가 또한 먼 거리였음으로서다. 풍문에 의하면 그는 서울에서 인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대학교에 진학, 국문학을 전공하고 서울 시내의 한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 되었다고 했다. 늘 초등학교 교사로 불만과 열등의식이 많았던 나, 중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던 나는 그의 그러한 처지가 잠시 부럽기까지 했다.

아마도 그것은 2천년대 초엽이었지 싶다. 서울의 한국교육신문사란 데에서 전국의 초?중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마다 한 차례씩 문학작품을 모집하고 시상을 하는데 시부문의 심사를 맡아줄 수 없겠느냐는 전갈이 왔다. 마다할 이유가 없기로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두번째 심사를 할 때였지 싶다. 나한테로 돌아온 원고뭉치를 읽어가다가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허근이라는 이름이었다. 아, 이 이름은 나의 중학교 동창생의 이름이 아닌가? 주소를 확인해보니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되어 있었다. 허씨란 성씨도 그러하지만 근이라는 외자 이름도 그리 흔한 것이 아니어서 나는 이 사람이 바로 내 중학교 동창생이 아닐까 싶은 직감으로 작품을 다시금 자세히 읽어보았다. 당선 수준은 아니지만 시들이 꽤나 견실하고 깊이가 있어보였다, 심사장에 나아가 동료 심사위원과 합의하여 당선작 아래 단게인 가작으로 결정을 보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신문사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바로 내 중학교 동창생 허근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나에게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를 읽어주었던 친구. 그 모진 추위의 다다미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등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했던 친구. 어떤 의미에서 그는 나에게 박목월 선생을 소개하고 박목월 선생의 시를 가르쳐준 문학의 안내자요 스승과 같은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니 이 사람, 이게 얼마 만인가?
그도 이제는 머리칼에 제법 흰 물감이 들어간 초로의 남자로 변해있었다. 우리는 더듬더듬 묵은 기억의 실꾸리를 끄집어내어 상대방의 옛모습을 확인하면서 약간은 어색하게 손을 잡았다.
자네, 본래 이름이 수웅이 아니었나?
친구는 나의 중학교 시절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태주란 이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바꾼 이름이고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수웅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나의 이름이었다. 나더러 수웅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무조건 옛날 사람이다. 중학교 이전의 나를 아는 사람이다. 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 이렇게 해서 우리는 40년만에 초로의 연배가 되어 재회를 하게 되었고 인연과 우정의 고리를 완성하게 되었다. 한편의 시가 놓아준 아름다운 세월의 징검다리요, 마음의 꽃다발이었던 것이다.


2. 은둔시가隱遁詩歌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는 하나의 은둔시가의 표본이다. 1940년 초. 암울하던 시절. 일제의 강압통치가 극에 달했던 시절. 국제정세까지 세계대전으로 치달리고 있을 때. 일개 식민지 백성으로서 또 무력하기 짝이 없는 문사로서 청년 박목월은 숨어 사는 인생을 꿈꾸고 은둔의 삶을 그렇게 노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사, 세상사, 허무함을 깨닫고 그것을 달래기 위해 자연의 목소리를 빌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실망하고 세상에 실패했을 때 돌아가 안길만한 곳으로 자연보다 더 푸근하고 아늑한 귀의처(품)가 어디 있겠는가. 특히, 동양인의 세계관으로선 더욱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연의 생존방식과 섭리에 따라 자신의 인생설계 또한 그렇게 펼치고 싶어한다. 항용 이런 부류의 시들이 간접화법, 명령어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것이다. 우리 문학 전통에서 은둔시가를 찾아보면 먼저 고려시대 「청산별곡」이 먼저 떠오르고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
- '청산별곡'  일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 나옹선사

위의 두 작품 역시 몇 가지 관점에서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첫째가 난세에 시가 나왔다는 점이고, 둘째가 자연회귀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고, 셋째가 소극적이며 순응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고, 넷째가 한의 정서를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은 70년대에 쓰여진 신경림 시인의 작품이나 음유시인으로 불리는 가수 하덕규 씨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점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목계장터' 일부(1976년 발표)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어차피 바람으로 살다갈 것을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하덕규 '한계령' 전문(1984년 발표)


위의 두 작품은 모두 정치적, 사회적으로 매우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난 작품들이다. 우리나라 근세사의 질곡이라 할 유신헌법으로 태동한 제 4공화국 시절, 내지는 제 5공화국 시절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역시 앞에 보아온 고려시대의 시들이나 「산이 날 에워싸고」에서처럼 명령어법, 간접화법을 활용하고 있다. 작품의 특질 역시 앞에서 지적한 바 있는 네가지 항목을 고루 충족시키고 있다. 이 역시 은둔시가에 해당하는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는 현대시사의 흐름 위에서 암울한 시대가 낳은 은둔시가의 한 효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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